먼지 묻은 삶

1987년 겨울 부산여행

史野 2007. 1. 5. 20:23

1987년 새해가 밝았고 대학생활 일년을 무사히(?) 마친 나는 고등학교 동창친구들을 끌고 부산여행을 떠났다.

 

왜 친구들과 함께가 아니라 끌고냐면 여행을 주동한데다 한 친구만 엄마에게 나랑 그냥 여행간다고 허락을 받고 한 애는 우리 외가가 부산에 있다고 해 허락을 받고(우리 친척은 충청도 이남엔 아무도 안산다..ㅎㅎ) 한 애는 내 선배집에 묵는다고 해 허락을 받았다는 것(선배들이 있긴 했지만 모두 남자선배들인데다 어디도 묵을 생각은 없었다..ㅎㅎ).

 

 

밤차를 타고 떠나기로 했기에 어디서 만나냐 뭘 가지고 가냐 자꾸 우리집으로 전화가 오니까 울엄마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로 뭔 일이냐고 묻더니 내 계획을 듣고 하신 명언

 

' 넌 내딸이니까 네가 타락하는 것까진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남의 딸들까지 책임질 순 없는데 어쩔려고 그러느냐!'

하.하.하.

아시다시피 나야 고등학교때부터 방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우리엄마는 정말 강적이다.

 

어쨌든 각자에게 회비 단돈 2만원을 걷고는 우리 넷 모두에게 생애 최초인 부산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네 명이 의자를 돌려앉아 밤새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던 무궁화호 차안.

 

나야 고등학교때 언니랑 밤차를 타고 경포대에 가봤지만 밤차는 처음인 친구들이라 어찌나 흥분들을 하던지..^^

 

다들 대학생활이 고딩때와 뭐가 다른지 혹은 어떻게 살 것인지 미팅땐 어떤 애들을 혹은 어떤 남자친구들을 만났는지 꿈많았던 만 스물도 안되었던 여학생들에게 이야기거리야 무궁무진 했다.

 

물론 나는 꿈많은 애가 아니었는데 원하는 대학을 못가고 장학금까지 받아가며 과수석(이건 자랑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날라리라도 공부는 잘했다..ㅎㅎ)으로 들어간 대학은 도저히 적응을 못해 권총까지 차가며 꼴찌로 마감을 했던데다 도저히 계속 다닐 자신도 없던 때였으니. (결국은 그해 사월 휴학를 해버리게되니 아직 피지도 않았는데 불행한 청춘이었다..ㅜㅜ)

 

고2때부터 7명의 단짝들중 넷이었는데 하나는 고3때도 같은 반에 대학까지 같이 갔던 친구이기도 하고 워낙 성격이 좋은 나는(역시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 각자들하고도 무지 친했는데 떠돌아다니다보니 지금은 아무랑도 연락을 하지 않는다. 

 

뭐 다들 아줌마답게 잘 살고 있겠지만 그 중 그 후에도 나랑 여행을 몇 번 더 갔던 내 선배집에서 잔다던 그 친구는 많이 그립다. 그리고 나랑 여행을 떠날때마다 늘 진짜 믿을만한 친구라고 친구아버님을 설득해주시던 그 어머님도 뵙고 싶다. 딸내미친구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시던 참 좋은 분이셨는데..

 

그 친구랑 남도유람에 나섰을땐 광주에서 방까지 잡아놓고 당시 광주에 있던 내 선배집에 전화를 했는데 마침 그 집에 와있던 서클후배들이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짐을 들고 그 집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바람에 그때는 진.짜.로 선배집에 묵었다. 이 얘기도 꽤 재밌는데..ㅎㅎ

 

각설하고 새벽에 내린 부산역은 어찌나 춥던지. 그때야 인터넷이 있길했나 나도 초행인데 아무 정보없이 간신히 해운대가는 버스를 타고 어찌어찌 해운대에 도착을 했는데 이건 뭔일이다냐 학생때 난로도 없이 살았다는 그 남도땅 부산에 갑자기 눈이 내리는 것이다!!!

 

경포대도 아니고 해운대에서 눈오는 바닷가를 바라보는 행운이라니.

모두 감상적이 된 우리는 지금은 없어졌더만 그 중앙에 있던 어느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그때만 해도 내가 술을 잘 못 마셨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지만..ㅎㅎ)  다음 목적지로 출발을 하는데 오년만인가 그렇게 많은 눈이 내렸다는 부산은 한마디로 아수라장.

 

스노우타이어나 체인같은 것도 없는 버스는 기는 건지 서있는 건지 모를지경. 그래도 우리는 즐겁기만하고 어찌나 웃어댔는지 모른다. 남포동에서 대충 요기를 하곤 태종대를 갔는데 그때는 또 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아니 자갈밭은 반짝거리던 환상의 태종대.

 

차비까지 합해 이만원을 받았으니 책임자인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는 메뉴는 한정되어 있었는데 오백원짜리 짜장면(지금도 그 맛이 기억날 정도다..ㅎㅎ) 그리고 피곤했기에 일찌감치 찾아들어간 곳은 오천원짜리 여인숙. 친하게 지내던 동기놈에게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되질 않았고 넷이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일이 있어 먼저 올라가봐야한다는 한 친구때문에 모두 일찌감치 부산역으로 갔는데 세상에나 부산역에선 그 동기놈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거다!!

 

그 여인숙으로 전화를 했더니 벌써 나갔다고 하길래 역으로 갔겠거니 하고 나와 기다렸다나.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지만 하나만 갈려고 해서 부산역으로 온건데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갔으면 어쩔뻔했냐고 미련한 놈이라고 구박이나 해대고..^^;; (나한테 미련하다고 구박당했던 사람 뻔하지 과연 누구겠냐..ㅎㅎㅎ)

 

한 친구는 떠나고 친한 선배 하나를(혹 누가 물어볼까봐 미리 말하지만 들풀처럼님이 아니다..ㅎㅎ) 더 불러 용두산으로 어디로 부산구경을 좀 하고 완탕인지 유명하다고 해서 먹고 괜찮은 카페에 들려 커피도 마시는 갑작스런 신분전환까지 했다..ㅎㅎ 

 

그 선배 재밌던 건 눈이오면 태종대를 가야지 왜 바보같이 해운대를 갔냐고 구박하던데 해운대가서 눈왔는데 헬리콥터타고가냐 어떻게 태종대로 날라가냐고?? ㅎㅎ

 

짧았지만 잊을 수 없었던, 스물을 앞에놓고 설레하던 만으로 열아홉살의 여자아이들의 여행. (아 그러고보니 내가 더블린에서 고기공놈을 만났을때 그 놈이 만으로 열아홉이었는데..ㅎㅎ)  

 

그 후 부산에는 여러 번 갔지만 그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만으로 마흔을 코 앞에 놓은 2007년에 이십 년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는 것. 이것도 결국 추억되씹기, 늙어가는 증거인걸까.

 

이십 년이나 흘렀는데 난 여전히 프라하에서, 우에노에서 밤기차에 오른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는 친구들과 지금은 혼자라는 것뿐.

 

여전히 산다는 것에 자신없고, 아침마다 뭔가를 꿈구며 그렇게 중년을 살고 있다.

 

다음 달에도 우리부부는 각자여행을 떠나기로 했으니 난 또 눈을 찾아 기차에 오르게 되겠지

 

 

어쨌든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그리운 시간. 친구들보다도 난 이십 년 전의 나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헤매이던 너,

 

지금도 난 여전히 헤맨다만

 

그래도 지금의 나라면

 

네 어깨를 감싸안고

 

뭔가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길 

 

해줄 수도 있을 거 같아.

 

네가 바라던 건

 

그런거였는데..

 

 

 

 

 

 

2007.01.05 Tokyo에서..사야

 

 

21036

 

 

 

 

 

 

 

 

'먼지 묻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 당신에게  (0) 2007.01.09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보니  (0) 2007.01.06
정신병원  (0) 2006.12.29
명절 증후군 2탄  (0) 2006.12.16
너무 멋진 내 남자..ㅎㅎ  (0) 2006.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