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따뜻한 은신처

마지막 사중주 그리고 정전

史野 2026. 4. 5. 09:06

어제는 비가 와서 나가 일할 수는 없고 집안일을 하려니 흙퍼다 나른다고 근육통도 있어서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마지막 사중주
클래식음악영화인 줄 알고 엄청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음악을 매개로 한 인생에 대한 영화였다
독일어제목은 인생의 현이던데 그게 더 적절한 제목인 거 같더라
기대했던 영화가 아니었을 뿐 영화는 좋았다
요즘 영화 한 편도 집중이 힘들어 보다 쉬다 하는데 한큐에 다 봤다
늙어 병든다는 것 사별 연주자로 사는 것 부부관계 모녀관계 사랑 악기 등등 상당히 많은 굵직한 주제들이 있음에도 부산스럽지 않게 잘 녹여냈다는 생각
어떤 한 계기로 25년의 갈등이 터져 나오는 걸 보면 진짜 인생이란 뭔가 싶더라
25년을 함께하고도 나를 사랑하냐고 했냐고 묻는다는 건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참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음악영화가 아닌 건 또 아니라 음악에 대한 고민등을 듣는 것도 좋았다
지금까지 음악을 들으면서 제1바이올린이나 제2바이올린에 대해 그냥 다른 역할일 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영화에서 차별된 위치로 표현되는 건 꽤나 흥미로웠다
격정적인 모습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어도 전체적으로 차분한 사람들도 좋았다
이것도 일종의 편견이긴 하지만 미술 하는 사람들과 달리 늘 꾸준히 연습해야 하는 연주가들이 조금 더 절제된(?) 인격이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개성 있는 연기자들도 다 좋았지만 오랜만에 보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반가웠다
그가 마약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완벽하게 역할에 녹아드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늘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가 있는데 사야에게 그는 후자다
리플리에서도 다우트에서도 마스터에서도 여기에서도 그는 늘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다
나이가 다를 뿐 말투도 표정도 늘 그다
그러고 보니 헤어스타일도 크게 변하지 않았던 거 같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잘해서인지 식상하지 않고 볼 때마다 좋으니 신기하달까
더 신기한 건 그가 맡은 역할이 맘에 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말이다
지금쯤의 나이에는 어땠을까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다


영화를 보고 영화에 나왔던 낯선 베토벤의 곡도 좀 찾아 듣고 여기 보고 나서의 이런저런 느낌도 쓰고 그러려는데 툭하고 정전이 되었다
갑자기 집이 고요해지니까 너무 당황스럽더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제는 지하수를 안 쓰니까 전기가 나가도 물은 나온다는 거지만 정전은 정말 인터넷 안 되는 수준이 아니다
세 시간 가까이나 정전인 상태로 있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고 전기 없는 삶을 상상하게 되고 그렇더라지

우크라이나나 쿠바 정전뉴스를 그렇게나 봤어도 와닿지 않았는데 겨우 세 시간에 거창하게 세상이 멈춘 거 같더라니까
다른 상황이나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거였구나 하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절절한 깨달음
어렸을 때는 가끔씩 밤에 전기가 나가도 하얀 양초 켜놓고 라디오 같은 거 들으며 지금처럼 드라마틱하진 않았는데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우짜든둥 오버쟁이 사야는 전기가 없을 때도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봐야겠구나 싶다
마당에서 일을 하는 중이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은 시간이긴 한데 아무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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