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따뜻한 은신처

소주에 관한 추억

史野 2016. 3. 26. 02:41

사야가 이십삼년 육개월만에 소주를 마셨다. ㅎㅎ

물론 자몽쥬스에 조금 섞어 마신거니 소주를 마셨다는 말이 안 맞을 수도 있겠다만 그래도 사야에겐 좀 충격적인(?) 일이다.

준알콜중독자인 사야가 그나마 '준'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건 술을 가려마시기때문인 이유도 크다

집안에 술이 있어도 원하는 술이 아니면 마시지 않으니까.

남편하고 살 때는 위스키가 그랬고 지금은 소주가 그렇다.

몇달만 지나면 사야도 술을 마신 지 삼십년이 되는 데..ㅎㅎ 소주를 마셔본 적은 거의 없다.


그래 사야가 기억하는 저 적나라한 숫자.

소주는 전혀 마시지 못하던 사야가 첫사랑놈따라 카니발에 갔다가 소주를 그것도 남자구두에 마셨던 날.

그리곤 깰꼬닥 취해서 삼차까지 가서는 그 놈 선배들이랑 진짜 그 못 삼키던 소주를 소주잔으로 마구 들이켰던 날.

그리고 첫사랑놈에게 술힘이 아니라 소주의 힘으로 사실 나는 너를 많이 좋아했었노라고 고백했던 날..ㅎㅎ

그래서 졸지에 전남편이랑 삼각관계의 시작이 된 그 날..ㅜㅜ


요즘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로 연예세포들이 살아나니 어쩌니 댓글들에 난리도 아니던 데 사야의 젊은 날은 아니 연애는 그 드라마보다도 훨 달달하고 더 스펙타클(?)하고 더 절절했었던 것 같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가이니 안티는 걸 지 말길..ㅎㅎ


오래 잊고 있었는 데 소주를 마셨더니 절절했던 그 순간들이 또 마구 생각이 나더라

나이탓일까 연애세포가 살아나는 건 아니고 그리 격렬하게 사랑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게 참 묘하게 위로가 되더라.

그래 사야에게도 미친듯이 사랑했던 시간이,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할 이야기가 많았던 사랑의 시간이 있었더라.

고통스럽기만 한 이십대였는 줄 알았는 데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의 소금끼가 빠져버린 과거를 돌아보니 왠만해선 경험하기 힘들만큼의 아름다왔던 사랑이야기가 남아있더라구.


물론 이건 전남편에게도 첫사랑놈에게도 이젠 아무 감정이 남지 않기에 가능한, 그런 기억들이다

상대에 대한 감정이 배제된 채로 옛일을 돌아보니 참 아름다운 사랑이었더라구.

그래서 사야는 갑자기 막 부자가 된 기분이다.

엄밀히따지면 그때는 지금과 달리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었지만 이십대중후반의 세 남녀의 절절한 러브스토리

이번에 청소하다가 지구본을 닦을 때도 보니 정말 한눈에도 들어오기 힘든, 끝과 끝이던 데

인턴사원으로 한국에 왔던 독일남자가 음악회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지고 그 놈의 소주덕분에 그 첫사랑은 그 사랑에 개입(?)하게 된다?

결투신청까진 아니지만 여태 가만히 있다가 내가 알아보니 이제서야 뒷북이냐며 상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던 그 남자는 갈팡질팡하는 여자때문에 결국 또 한국으로 오고 ..아 이런 쓰다보니 막장인가? ㅎㅎ


우짜든둥 소주를 마시다가 생각났다고

꼭 아프기만 한 이십대가 아니었다는 걸.

진짜 태양의 후예의 그 간질한 말투들보다 사야랑 그들과 했던 이야기들이 훨씬 간질거리고 가슴설레였다니까.

서로 막 그랬다구 더 사랑하는 쪽을 택하라고 그런데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고.

아 정말 이걸 드라마로 만들어도 되겠다 싶다니까..ㅎㅎ


추억이 이런 거구나

흑백영화처럼은 아닌데 필터가 빠진, 가을날 햇살이 깃든 그런 장면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꼭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그저 들여다보게 되는 것.

거기다 막 너무 절절해보여 그 장면에서 꺼내서 위로도 해주고 싶은 것.

삶에서의 선택이란 건 너무 중요하지만 그 선택은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그러니까 결코 후회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결국은 자랑이다..ㅎㅎ

그때를 되돌려봐도 설레이지는 않는다는 게 함정이긴 하다만 앞으로 되새기도 또 되새긴다고 해도 슬며서 웃음이 나올 것 같으니까

첫사랑놈때문에 놀라서 구천킬로 가까운 거리를 두번이나 달려온(?) 그 남자나 직선거리로는 일킬로도 안되는 곳에 살면서도 구천킬로 달려온 남자를 배려해 모른 척 해주고 있었던 첫사랑놈이나 다 드라마 감이라니까..ㅎㅎ

좋다 참 좋다.

추억할 수 있는 절절한 사랑이야기 있어서..



각설하고

그래 소주는 추억을 짚어주고 가는 이걸로 되었다

만약 사야가 소주를 마시게 된다면

그건 정말 알콜중독의 지름길 삶을 포기했다는 걸테니까..

어찌보면 위험한 기로에 서있네..ㅎㅎ










'7. 따뜻한 은신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랫만에 우울했다 ㅎㅎ  (0) 2016.03.29
아련아련한 봄날  (0) 2016.03.27
사야는 청소중 ㅎㅎ  (0) 2016.03.24
참 답없는 나라.  (0) 2016.03.24
봄의 향기  (0) 2016.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