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망 좋은 방

아름다운 인연

史野 2007. 9. 25. 21:03

모든 관계는 인연이다. 부모와 자식 부부나 친구도..

 

나는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고 인복도 많지만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이 아름다운 인연은 1985년 5월 6일 내게로 왔다. 그때 나는 고 3이었다.

 

내가 막내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첫 만난 생명의 신비. 내 첫 조카였다.

 

얼마나 좋았던 지 그 놈 백일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다가 친구들에게 구박도 엄청 받았다.(남편사진도 안 넣고 다니는 내가 내 인생에서 또 하나는 친구 아들놈이었는데 맨날 자랑하다 왜 친구아들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냐고 구박받았다..ㅜㅜ)  마구 마구 자랑을 했는데 고 3 여자애들이 어땠겠냐. 그 귀여운(!) 고추가 달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어찌나들 소리를 질러대던지..ㅎㅎ

 

이 놈은 어려서 아프기도 많이 아팠고 성격도 까다로왔다. 그래도 내겐 보물이었고 어린 아이가 너무 분위기 있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마디 할 정도.

 

내가 우리엄마를 미워하는 이유는 백만가지지만 (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도 백만가지다) 이 조카놈때문인 이유도 아주 크다. 남들은 보통 아들에 대한 사랑이 손자에게 전이된다는 데 우리엄마는 다르다.

 

아 당근 엄마야 조카놈을 너무 사랑한다고 생각하신다. 하긴 뭐 내게도 너를 너무 사랑하고 너를 위해서라면 내 뼈가 가루가 되어도 좋다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니 오죽하겠냐만.  (울 시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충격받아 거의 경기수준이셨다..-_-)

 

그 어리고 연한 놈을 어찌나 때리던지 정말 미치고 팔짝 뛰는 줄 알았다. 내가 맞고 자란 것만 생각하면 예전 기억이니 잊고 엄마를 용서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고통을 내 조카가 고스란히 받고 있다는 건 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 놈이 잘못될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했었는 지 모른다. 특히 초딩때 그 놈이 자기엄마에게 거지로 살아도 좋으니 이 집에서 나가자고 울더란 이야기를 듣고는 아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내가 한국에 올 때마다 그 놈을 데리고 나가 맛있는 걸 사주며 그 놈을 달랬지만 내가 겪었던 아픔이고 나 역시 극복하지 못한 문제인 관계로 긴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내겐 그 놈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이 내 상처에 늘 소금이 뿌려지는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거야 교회나가기 싫어하는 그 놈에게 중학교때부터는 다니지 말아라 할머니는 고모가 책임진다 뭐 이런 정도.

 

그 놈도 사춘기를 겪고 또 고등학교때 친구까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겹쳐 힘들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도 가야하는 데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그 놈방에 들어가 그 놈이 쓰는 연습장 뒷쪽에 (그러니까 어느 날 발견하길 바라는 심정으로) 아주 긴 편지를 써놓고 온 적도 있다.

 

결국 그 놈은 마음에 드는 대학에 가지 못했고 재수를 하겠다는 그 놈에게 또 내 엄마는 개판을 치셨다. 그 놈을 불러다 너같은 놈이 어떻게 재수를 하겠냐고 괜히 아빠만 힘들게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신거다.

 

올케언니는 그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술을 왕창 퍼마신 후 시어머니에께 전화해서 주정을 했었다. 만약 어머님이 내 자식에게 그렇게 했다면 난 절대 어머님을 용서하지 않았을거라며 엉엉 울었다.

 

엄마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식의 이야기를 했을 지는 안봐도 비디오니까. 우리 엄마는 남에게 상처주는 말하는 데는 기네스북 감이다.

 

예전에 사진도 올렸지만 그 후 그 식구들이 도쿄에 왔었고 닛꼬로 여행을 갔을 때 걷다가 그낭 슬그머니 '얌마 할머니가 뭐라 하셨다며? 할머니 원래 그러신 분이잖니. 할머니가 한 말은 그냥 잊어라.' 이 놈 씩 웃으면서 '단점만 골라 말하시는 데 어떻게 잊어요?' -_-

 

젠장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 오빠는 가족에게서 위안을 얻고 가족이 전부인 인간인데 그러니까 목숨보다 소중한 게 우리 언니랑 자식들인데 엄마는 여전히 언니와 조카들이 오빠를 힘들게 하는 짐이라고 생각하신다. (참 지난 번 찜질방 갔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길 하다 자긴 가족이 전부라길래 그게 가족에게 부담이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ㅎㅎ)

 

엄마에겐 비밀로 하고(이러니 저러니해도 우리는 다 엄마에게 설설 긴다..-_-) 어쨌든 그 놈은 재수를 했고 만족할만한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첫 대학보다 나은 대학에 들어갔다.

 

역시 난리인 울 엄마 덕분에 한 번 그 놈에게 그런 적이 있다 할머니 원래 그러신 분이니 그냥 네가 인정해야한다고 (나도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은 넓다..-_-) 할머니가 극성맞으셔서 이모할머니랑 비교 아빠랑 고모들을 잘 키운 건 인정한다. 그래도 그래서 내게까지 그걸 고마와하고 할머니를 참아야한다면 그건 잘못이라고 말하던 놈. 네 말이 맞다..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 놈은 그걸 나름 극복하고 마음이야 어떻든 할머니를 챙기는 나보다 나은 인간이 되었다. 지난 번에 나 왔다고 하루 외박을 나왔었는데 우리집 잠시 구경하고 그때야 아무것도 없었으니 해줄 수는 없고 내가 밥산다고 나갔더랬다. 오빠네부부랑 나는 신나게 떠들며 걷는데 이 놈은 동생이랑 다리 아프신 할머니 보조를 맞춰 걸어오는데 너무 대견했다.

 

몇 년전인가 울 오빠 그 놈에게 너는 나중에 고모에게 정말 잘해야한다고 하길래 나중에 그 놈에게 그랬다. 너는 엄마아빠에게나 잘하면 된다고 고모는 고모가 알아서 잘 할테니 고모걱정은 말라고..

 

이 놈 쿨하게..고모 앞일을 누가 알겠어요? 그러니 너무 그렇게 장담하지 말아요..네 말이 맞다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엄마생일이라고 엄마가 좋아하는 바게뜨빵이랑 꽃을 사들고 오고 재즈피아노 연주도 해줄줄 알뿐 아니라 군대가며 혼자(?) 남을 엄마를 위해 저렴하고 괜찮은 인터넷 옷가게까지 즐찾을 해놓고 가는 놈.

 

좋고 비싼 옷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따져 먹는 까다로운 인간이면서도 용돈을 어마어마하게(!) 모았다길래 젊은 놈이 왜그러냐니까 쓰는 것도 젊음의 특권이지만 꿈을 위해 돈을 모으는 것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는 멋진 놈.

 

오죽하면 오빠가 아직 대학생인 놈에게 큰 돈을 빌려주며 투자를 해보라고 했겠는 가.

 

내가 그 놈에게 가장 반한 일은 발표를 할 때 손에서 땀이 난다며 자기 엄마에게 ' 엄마 나 정신과에 가볼까' 하더라는 것.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해결책까지 생각했다는 데 무진장 감동했다. 이런 사회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어찌나 뿌듯하던지 아 이 놈은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다.

 

다섯살이나 어린 동생에게도 무진장 잘한다. 우리 오빠가 ' 내 동생이 (그게 나다..ㅎㅎ) 정말 대단하지' 하면 그 놈 ' 내 동생이 아빠 동생보다 나은 것 같은데? 'ㅎㅎ 뭐 내가 보기에도 둘째 놈이 나보다 낫긴 하다...^^

 

오늘 그 놈 면회를 다녀왔다. 워낙 또 한 유난하는 우리 오빠 언니들이야 내일 온다는 데 오늘 같은 날 그 사랑스런 아들내미 얼굴이 보고싶지.

 

나야 오늘도 달리기를 했고 아침에 집에 가지도 않았지만 오늘 가려던 곳이 어긋나기도 해서 면회는 따라가기로 했다. 언니가 먹을 거야 당연히 잘 챙기겠지만 나는 디저트로 서둘러 배숙을 만들고 들어온 한과를 챙겨 나갔다.

 

그 놈이 군에 간 후 두 번 만났는 데 군복을 입은 걸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내가 나이들었다는 걸 절감하는 순간은 군인아저씨(!) 얼굴이 애라는 것과 애가 애를 낳아서 돌아다니는 걸 볼 때다..ㅎㅎ

 

친구놈 면회를 간 후 거의 이십년만에 군부대에 간 건데 그 면회대상이 내 조카라는 사실이 기분 묘하더라. 타고나길 자상한 친구놈은 당시 편지에서도 늘 그 조카놈 안부를 묻곤 했었는데 이제 조카놈이 군인아저씨라니..

 

예전과 달라져서 군 부대안 면회장소에 부루스타까지 가져가 고기를 구워먹으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워낙 감성적인 놈이라 비인간적인(!) 군생활을 잘 견딜까 마음이 좀 쓰였는데 너무나 씩씩하고 얼굴도 편한해서 보기 좋더라.

 

언니 딸내미 해물스파게티 해준 이야기가 나와서 자기도 11월에 휴가나오면 해달라던데 얌마 고모가 너에게 뭔들 못해주겠냐..ㅎㅎ

 

괜찮은 포도주까지 준비해 놓겠다니 포도주는 자기가 사온다던데 까다로운 고모 입맛을 어떻게 맞추냐고 올케언니가 그래서 또 다 웃었다.

 

자식이 있었다면 달랐을 수도 있겠고 뭐 있었다고 해도 그 놈보다는 어릴텐데 태어나서 군인으로 성장하기 까지의 그 과정을 모두 아는 나로서는 오늘 그 인간이 뿌듯해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내가 이런데 언니나 오빠는 오죽할까. 울 오빠 결혼도 시키지 말고 데리고 살까 하던데..ㅎㅎ

 

물론 내게 그런다고 안하냐? 쓸데없는 생각말고 어떻해야 며느리에게 잘 보여 내 아들이 편안할까를 더 고민하라고 구박받았다만..^^

 

참 내가 조카의 콜렉트 콜을 받자마자 끊었다니 오빠가 자기들은 혹 끊어질까 전전긍긍하는데 어떻게 감히 끊을 수가 있냐더라..하하하

 

조카가 여섯이고 다 너무 이쁘지만 내 인생에서 첫 핏덩이로 만나 나보다 나은 인간으로 성장한 조카.

 

지난 번에도 썼듯이 나보다 18살이나 어리건만 내 성격에도 이젠 함부로 얌마 그게 말이 되냐? 소리를 못하게 하는 인간. 나와는 많이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게 하는 놈.

 

그 놈을 통해서도 인생을 배운다. 그 놈이 나를 걱정시킬 가능성은 희박하고 내가 그 놈을 걱정시킬 가능성이 더 농후하니 나도 조카놈보기 부끄럽지 않은 고모가 되어야겠다는 교과서 적인 생각이 드는 날.

 

22년 전에 내게로 온 인연. 그리고 아름다운 인연. 그 인연이 계속 아름다울 수 있도록 잘 살아겠구나 싶어지는 날.

 

군에 간 조카를 첫 면회하고 온 날이다...

 

 

 

 

 

2007.09.25 서울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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