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흔적

외로운 여자, 방황하는 여자

史野 2007. 7. 25. 10:56

오늘 정말 오랫만에 오후에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물론 저녁으로 특별한 음식을 먹은 후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신 적은 있어도 느긋한 오후에 커피를 끓여 마시는 사치를 부려본 지가 언제 일인지..

 

주말마다 신랑에게 줄 카푸치노를 위해 에스프레소를 올리며 갈등하던 시간..

 

이젠 마시고 싶단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오후의 커피는 내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는데 말이다..

 

왜 갑자기 아무 두려움없이 커피가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었던걸까.

 

 

오늘은 신랑생일이라 어디 식당이라도 예약할까 하다가 어제 그냥 둘이 들어가는 파티로 대신했다. 

 

그냥 회 사다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술도 많이 마신데다 요즘 내 상태가 별로다보니까 그만 해서는 안될 말들을 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말들을 했다는게 아니라 내 머리속을 빙빙돌고 있지만 결코 내입으로 꺼내지 않으리라 다짐의 다짐을 했던 말들을 말이다.

 

취중진담이었달까.

 

마음속에 그저 담아뒀던 말들이었기때문인지 바보같이 눈물은 또 왜그렇게 쏟아지던지...

 

술도 취한 주제에 첫 째 이유 둘 째 이유 어쩌고 번호까지 달아가며 조근조근 설명하는데  끊임없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리더라.

 

그런 내가 처절해보였는 지 내 말들이 처절했는 지 신랑까지 연신 눈이 벌게져서는 생일축하파티한답시고 앉았다가 신파영화 한 편 찍었다.

 

우리부부가 구구절절히 나눈 대화를 다 여기 옮겨다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우리대화중 빠지지 않는 내 병이야기.

 

갑자기 이 남자가 너무나 심각한 얼굴로 '나는 너를 병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충격먹었다.

 

아니 당신이 나를 병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니, 그럼 14년 가까이 당신이 겪은 그 일들은 뭐냐니까.

 

그냥 자긴 그걸 모든 인간에게 연약한 면이 있듯이 그저 내가 가진 한 약한 면일뿐이라고 생각한다나..

 

잠 못자고 불안에 떠는 나와 보낸 그 밤이 얼마인데, 내가 술을 퍼마시는 게 나름 나를 견디는 거란 걸 알기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도 말도 못했다던 남자가 그렇게 말을 하다니..

 

그래 그런거였구나.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당신 나름 버텨낸거구나.  

 

그저 다른 남자들이 '내 마누라는 요리를 못해 뭐 요리 좀 못하면 어때?' 하는 그런 심정으로 견뎌낸거구나.

 

......................................

 

어제 밤 아홉시경

 

전날 술로 너무 피곤한 신랑은 여기 저기서 걸려오는 축하전화들을 받느니 어쩌느니 하고 있고 나는 여기서 이렇게 심각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는데(그러니까 저 윗 글은 어제 쓰다 만거다) 도어폰이 울린다.

 

드라마틱하게 말하자면 여기사는 사년 가까운 세월동안 예고없이 도어폰이 울린 건 처음. 우리 아파트는 외부인이 직접 도어폰을 울릴 수 없는데다 프론트테스크 사람들도 미리 전화없이 도어폰을 누르는 일이란 없다.

 

 

그렇게 불쑥 도어폰을 누르며 나타난건 크리스토프. 얼마나 놀랬는지..

 

아니 8월중순에 온다며 왠인이냐니까 급출장이란다..^^

 

아 이런 깜짝선물이라니..인간선물아 사진 한 장 찍자..ㅎㅎㅎ (아 크리스토프는 울 신랑 생일인지 몰랐었다지만..)

 

여행을 가야해서 냉장고비우기를 하는 중이라 대접할만한 것도 없어 급하게 위로 올라갔더니 이 웃기는 사람들은 마지막주문이 여덟시 반이라네..ㅜㅜ

 

 

그래 신랑만 바지하나 간신히 갈아입고 나는 뭐하나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아 전날 울었더니 저때까지 눈이 퉁퉁부어있네..ㅜㅜ)

 

일년 7개월만에 만난 크리스토프는 꼭 어제도 본듯하고 엄청 피곤해서 아홉시에 벌써 잘까하던 우리부부는 갑자기 살아나서는 신나게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그랬다.

 

아 정말 간절히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웃으며 살고 싶다.

 

크리스토프랑 헤어져 돌아오는 늦은 밤. 신랑도 어찌나 좋아하던지..그래 당신도 사실 외로운 거구나.

 

우리야 이 커플이 돌아오는 게 너무 좋지만 이야길 들어보니 크리스토프는 승진해서 오는데다 해외출장이 무지 잦을 전망이라는데 휴직하고 오는 자비네는 착잡하겠다 싶어 짠하다.

 

동병상련이라고 애도 없고 주변에 가족이나 친구도 없고 말도 잘 안통하는 곳에서 남편은 툭하면 출장예정이라니...거기다 자비네는 이십년동안 일을 했었는데 갑자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쉽지 않을텐데 말이다.

 

자비네가 보낸 메일 중 '그래 마음 복잡하지만 그래도 우리를 기다리는 너희들이 있다는 게 기쁘다'던 그 말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내가 갈등을 했듯이 크리스토프가 도쿄에 다시 갈래? 물었을 때 얼마나 많은 내적갈등을 겪었을까.

 

남편에게 주어진 기회. 크리스토프는 내 남자보다 다섯 살이나 더 어린데...

 

 

어쨌든 우리는 모레 저녁비행기로 싱가폴로 떠난다. 8월 18일 돌아올 예정이니까 삼주가 좀 넘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번 여행은 우리부부에게 무지 중요한 여행이 될 듯하다.

 

우리부부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많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게 서로를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인데 여행을 떠나 신랑과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 나도 내 삶의 가닥을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2007.07.25.Tokyo에서...사야

 

 

28000

 

 

내 선물이 뭘까 궁금해하실 몇 분을 위해..^^

 

왼쪽 두 개는 술잔과 술주전자인데 이 술주전자가 너무 마음에 든다 오른 쪽 두 개는 녹차주전자와 잔. 모두 신랑선물이므로 잔은 한 개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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