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인가 옛 지인으로 부터 멜을 하나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도쿄에서 안부 전한다며 당장 답장을 보냈는데 오늘 왠 도쿄냐고 답장이 왔다.
내가 도쿄에 산 지 벌써 삼 년하고도 반인데 왠 도쿄냐니 진짜 오랫만에 연락을 주고 받았나 보다.
어쨌든 '그 남자'라는 이 명칭은 내가 부른 건 아니고 오늘 온 메일의 마지막에 '그 남자'라고 적혀 있었다.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그래 오늘 제목은 그 남자의 메일이다.ㅎㅎ
나는 그 남자를 더블린 마지막 해에 만났다.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그는 잠시 본사파견근무자로 일했다.
더블린이야 물가가 하도 비싸니까 모두들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는 데 원래 조직생활을 잘 못 견뎌하는 나는 점심시간까지 회사에 있고 싶지 않아서 늘 나가서 밥을 먹었다. 식사하며 술 한 잔 걸치면 다시 기운이 솟아 후반부를 잘 이겨낼 힘이 났더랬다.
이건 농담이 아니고 어떤 분은 그래서 아니 하루종일 전화받아 피곤할 텐데 어찌 퇴근시간까지 처음 전화를 받는 것처럼 밝고 친절하냐고 하시곤 했다..^^
그 남자가 오고 부터는 그 남자가 그러니까 내 점심식사 파트너가 되었고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오늘 메일에도
'이럴때 더블린 처럼 점심때 와인 한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면 많이 도움이 될텐데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 남자에게 무진장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나보다 세 살이 많은 독신남이었던 그 남자가 어느 날 다른 늙은(?) 직원들과 함께 (다들 칠십 년대 생이었고 나까지 넷이 육십 년대 생이었다)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
식사 후 담배도 피지 않는 그가 오랫동안 베란다에서 들어 오질 않길래 나가 봤더니 자긴 결혼을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별로 해보지 못했는데 오늘 00씨 집에 와 보니 아 나도 결혼해서 이렇게 살고 싶다란 생각이 든다고..
결혼한 사람에게 당신들처럼 살고 싶어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처럼 감동적인 말이 있을까? ㅎㅎ
재밌는 일도 있었는데 내가 담배를 피우며 무슨 말을 하다가 독일에 와서부터 담배를 피기 시작한 초보(?)라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 남자가 너무나 좋아하면서 '그렇지요? 한국에선 담배를 안 피웠지요? 안그래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하하 아마 보수적이었던 그 남자는 담배피는 여자에 대한 한국적인 편견이 있었나보다. 왠 이상한 여자인가 했다가 안심하는 듯한 그 표정이 어찌나 우습던지..^^
그 사이 그 남자는 결혼을 했고 지금은 말레이시아에 있단다.
내 남자의 안부를 물으며..
'잘 지내고 있겠지요 지금도 여전히 중후하고 부드럽고.멋진 남자의 모습을 가지고.
안부 전해 주시고 많이 보고 싶다고 전해줘요…아마..내가 머지 않은 미래에 도쿄로 한번 날아 갈 거라고……'
당시 내 남자는 중후함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요즘이 진짜 중후하고 멋져 졌는데 그 남자가 보면 놀랄지도 모르겠다...ㅎㅎ
내 남자보다 한 살이 더 많은 그 남자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청년같던 그 남자도 이제 중후함과 여유로 무장한 멋진 중년일지 궁금하다.
머지 않은 미래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도쿄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면 우리가 그 사이 보낸 세월을 양념으로 해 무지 반갑겠다 싶다.
떠도는 삶도 늘 서러운 건 아니고 때론 꽤 재밌다.
그리고 나야 지난 인연들을 잘 못 챙기는 게으른 인간이긴 해도 이렇게 그 남자처럼 스쳐간 인연에게 문득 안부를 들으면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그 마음이 참 고맙다.
2007.05.09 Tokyo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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