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늑한 모래실

산다는 건

史野 2010. 12. 31. 02:31

 

 

 

1.

무지 무지 추운 이 겨울 추위를 모르고 지내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어차피 시골에서 아파트같은 실내를 기대할 순 없는 것.

실내 온도는 늘 17도 정도지만 위풍이 없어서인지 집이 참 아늑하다

거기다 저녁마다 피는 난로는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한다.

작년 겨울 그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사람이 이럴 수도 있는건가 싶을 정도로 그저 고마울뿐

 

2.

우연히 지난 연양리동네에 지하수펌프가 고장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터가 아예 타버려서 수도없는 집은 이 엄동설한에 물없이 산다는 이야기.

그냥 눈딱감고 내년 7월 계약기간까지 버틸까 수도없이 생각했었는데

만약 내가 그 집에서 이 겨울을 나고 또 물까지 없이 살았어야했다면 난 아마 미쳐 죽었을거다.

천국과 지옥이란 게 별 대단한게 아니란 생각.  

그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게 과장없이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것처럼 아찔하다.

거의가 전월세를 사며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인데 종이집도 모자라 단수라니

그 땅투기로 잘먹고 잘사는 인간들 천벌을 받을거다.  

 

3.

요즘은 데려온 강아지때문에 늦둥이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산다.

개와의 교감이 나를 이렇게까지 행복하게 할 준 몰랐다.

큰 놈들도 어린 강아지라고 알아서들 챙기는 걸 보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

개를 키우지 않았다면 이런 소중한 것들이 있는 지도 몰랐을테니 억울하기까진 않았겠지만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큰 복이다.

어차피 아파트에 살았다면 개같은 건 키우지 않았을테니 귀촌이 내게 준 귀한 선물이다.

 

4.

이제 겨우 마흔중반의 나이

벌써 트위터니 스마트폰이니 낯설고 어색한 단어들이 자꾸 늘어난다.

휴대폰도 없앨까 고민하는 마당에 그들과 친해질 수도 없는 노릇.

무더기로 몰려나와 몸을 흔들어대는 노래들도 듣기싫고 이러다 진짜 외곬수 늙은이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아이들이 없으니 특별히 노력을 해야할  필요도 없고

자꾸 젊은 세대들과 교감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만가니 걱정은 걱정이다.

 

5.

신경정신과 약을 끊은 지 한달이 되었다.

원래 약을 먹기보단 상담을 받는 게 목적이었으니 별 상관이야없고

어차피 선생님은 일년만 상담하겠다고 했으니 다른 의사를 찾아야겠지만

열달 넘게 투자한 시간이 많이 아깝다

정말 좋은 상담의사였는데 다시 어떤 의사를 만나 또 새로운 이야길 해야하는 건지

상담을 받지 않으며 이해하기엔 내겐 아직도 삶이 벅차다.

 

6.

전 남편이 다니는 회사가 공중분해되었단다.

모스크바에 간지 겨우 일년

러시아를 죽어라 공부하며 고생만 많았을텐데 안쓰럽다.

만약 내가 또 일년만에 러시아를 떠나야했다면 난 아마 미쳐버렸겠지.

물론 그런 생활이 지겨워 떠나온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리 다행스러운 걸보면 사람은 어차피 이기적인 건가보다.

함께한 세월이 기니 잊을 수는 없겠지만 이젠 우리도 그만 서로에게서 자유로와 질때인 듯.

 

7.

생활이 단순해서일까 하루종일 컴퓨터를 켜놓긴해도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거나 남의 글들을 읽거나 하는 일들이 쉽지가 않다

미치도록 풀어내던 적도 있었는데 이젠 토해내지 않아도 될만큼 상처가 아문걸까

달이 지는 지 해가 저무는 지 분간이 가지 않는 날들이지만

늦은 밤 이리 앉아있는 걸 보면 무의식까지 그런 건 아닌가보다

어쨌든 난 내가 참 대단한 인간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걸 인정하게 되었으니

그래 아직은 내게 할 일이 남아있는 게 분명하다

 

 

 

 

2010. 12. 31. 여주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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