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묻은 책장

소설을 읽는 기쁨

史野 2024. 1. 29. 17:06

우연히도 두 소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되었고 둘 다 여행 중의 이야기다
지난번에 산 책들도 장르가 전혀 다른 책임에도 둘 다 에밀리 디킨스의 시구절을 앞에 써놓았더랬는데 이런 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야는 그저 신기하다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삼십 년 전에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 나왔던 영화를 독일어 더빙으로 봤었는데 이해를 제대로 못했다
사실 내용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두 사람으로 상상하며 읽는 걸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영화를 먼저 본 부작용 같은 거랄까

이 소설은 달링톤홀이라는 저택에서 일하는 버틀러가 주인의 멋진 차로 여주인공을 만나러 떠난 일주일간의 여행 중 일어나는 일과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을 하는 시점은 이차대전이 끝난 후지만 회상의 시대배경은 일차대전이 끝난 후부터 시작된다
영국인 주인을 모시며 거의 평생을 살았는데 새로운 미국인 주인과의 문화적 차이로 혼란스러운 노년의 집사

아버지도 버틀러고 인생의 유일한 가치가 최고의 버틀러가 되는 것인 주인공은 편집증으로 보일만큼 그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한다
심지어 자유시간에 읽는 책마저도 자신의 언어스킬을 향상하기 위한 도구일 뿐 오직 주인의 가치가 자신의 가치요 그 가치를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일념뿐이다
과문한 탓에 단정하긴 어렵지만 전문성에 이렇게 천착하는 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랬던 그가 여행을 하며 회상하는 과정 중에 조금씩 흔들리고 곱씹어보고 하는 과정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또 아름답게 표현되는지 정말 푹 빠져서 읽었다
많은 영어소설들을 읽어본 건 아니지만 올드한 표현들이 많아서인가 표현자체로도 웃음을 자아내고 언어에 더 집중해서 읽은 소설은 처음 같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답게 끊임없이 고뇌하는 그의 사고과정을 들여다보는 건 새삼스레 소설을 읽는 기쁨을 상기시켰다

아무리 어려서부터 영국에서 자랐다고는 해도 일본인 부모아래서 일본문화로 키워졌을 삼십 대의 작가가 어찌 가장 영국적이랄 수 있는 소재로 인간의 보편적 가치라는 건물을 축조해 낼 수 있었던 건지 사야는 그게 가장 놀랍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사랑과 신념 인간의 존엄 선택과 회한까지 모두 담아내는데 과함도 모자람도 없다

거기다 매일 진행되던 이야기가 여주인공을 만난 후 이틀 후 다시 이어지는데 그 공백을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놔둔 저자의 섬세함도 인상적이다
여주인공과 헤어진 후 우리의 스티븐슨 씨는 이틀간 어떤 심정으로 보냈던 걸까
낯선 이에게 속을 터놓는 그의 모습에서 그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볼 뿐

소설 속에서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일하는 사람끼리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노예도 아니고 면접 보고 채용되는 신분인데 왜 야반도주를 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거기에 창창한 커리어가 눈앞에 있는데 포기했다고 안타까와하는 장면
여주인공의 결혼얘기에서도 그렇고 커리어를 포기하고 가족을 꾸리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사야에게는 안소니 홉킨스와는 다른 인물이 만들어졌다
키도 더 크고(이건 그 아버지가 크므로) 더 마르고 조금은 더 신경질적인 인상의 사람이었을 같다
소설을 읽다 그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순간이 몇 번 있었다
모르는 단어도 많았지만 아는 단어도 주로 다른 의미로 쓰여 매번 찾아보느라 읽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그 수고로움이 상쇄되고 남을 만큼 매력적인 책이었다

더블린으로 이사 갈 때 영국허리를 횡단했던, 까맣게 잊고 있었던 풍경들이 그의 여행길을 따라가며 자꾸 생각이 났다
영화를 다시 보려고 찾아보니 티비에 없어 어찌 보면 다행이다
물론 기회가 되면 보고 싶긴 하지만 우선은 사야만의 스티븐스 씨를 조금 더 오래 간직해야겠다

..my heart was breaking
이 한 문장이 참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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