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친구글을 올리기도 했고 또 어제 새벽에 떴떤 이재명 김부선이란 검색어때문에 모님방에가서 열변을(?) 토하기도 해서인 지
24시간이 넘도록 또 못자는 사야 여기다 수다라도 떨어야겠다
국제결혼을 했다는 것도 특이한 케이스이긴 했다만 당시 사야는 애국심에 불타는 인간이기도 했다
유학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유학생들이 현지인들과 교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야가 가장 행복했던 크리스마스는 고기공놈이나 무소카놈에겐 가장 외로왔던 시간이었다는 걸 함께 살았던 그 나라가 결코 같은 의미로 기억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사야는 독일에 살 때 사야가 아는 사람들이 최대한 독일을 이해하길 바라는 시도를 많이 했었다
우선은 사야가 국제커플이니까 사야네 집에 오게 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완벽한 독일의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을 시댁으로 마구(?) 끌고 갔었다
시댁이 같은 도시이기나 했냐 서울과 청주거리라서 한번 가면 자고와야했는 데 그때 정말 사야는 그저 큰 돈 쓰고 독일까지 와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경험, 그러니까 온전한 독일가정을 체험시켜야겠다는 사명감(?)같은 거에 불탔었다
지금 생각하면 시어머니에게 넘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땐 정말 한명이라도 더 오리지널 독일가정을 체험하게 해주고 싶었다니까.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음날엔 사야가 못 일어났다는 것..ㅎㅎ
사실 오늘도 그래서 친구랑 웃었는 데 그럼 시아버님이 사야가 일어나서 나올 때까지 그 사람들과 놀아주셔야했다.
한번은 유학생도 아니어서 독일어는 커녕 영어도 못하는 사람과 시댁에 간 일이 있는 데 결국 남편이 깨우러왔다
신랑왈 지금 아빠가 00이랑 너무 애쓰고 있는 데 아무래도 네가 나와봐야할 것 같다고..^^;;
말이 안통하니 울 아버님 온 집안의 사진을 보여주고 계셨더라지..ㅎㅎ
그렇게 사야때문에 시댁에 와서 잤거나 최소한 식탁에서 밥을 먹은 사람들이 수십명이다
오늘 통화한 지지바도 고기공놈도 무소카놈도 어딘가에 살고 있을 등등도..ㅎㅎ
친부모라도 그러긴 쉽지 않은 일이었고 독일도 시댁은 시댁인 데 그냥 사야는 그랬다
남편에게도 시부모에게도 너희가 한국마누라 혹은 며느리를 얻었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한다는 배짱같은 것도 있었지만 진짜 부모라고 믿었던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미안하긴해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사야랑 연락을 하건 안하건 그들에겐 그게 다 여전히 삶속의 진한 추억일테니까
거기다 그때 사야의 시아버지는 현역이셨고 집안일은 전혀 안하셨던 관계로 사야가 대령하는(?) 색다른 세계를 즐거워하시기도 했더랬다
우짜든둥 그게 벌써 이십년전이나 혹은 가까운 이야기다만 계기가 되어 생각해보니 시부모님의 그 넉넉했던 대응이 참 고맙기도 하고 그립다
말도 잘 안통하는 사람들을 툭하면 끌고오는 며느리가 사실 얼마나 황당했을까
오늘 친구말대로 그저 맑은 눈으로 애쓰시던 아버님
제발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저 자식들이 하는 일이라면 백프로 따라주던 시엄마, 거길 다녀갔던 어떤 놈 말대로 그냥 이마에 교양이라고 써있는 것 같았지만 무슨 음식을 해야하나 잠자리는 어찌해야하나 고민했을 시엄마.
근데 왜 갑자기 이 모든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는 거냐..ㅎㅎ
또 갑자기 생각나는 데 아마 그 진실성과 솔직함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야엄마가 온다고 시부모님께 같이 파리에 가자고 그랬더니 이 나이에 내가 거기까지 운전수를 하는 건 무리라고 여행비를 부담할테니 기차타고 가면 안되겠냐던 시아버지와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찬성하던 시엄마
생각할 수록 참 고마운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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