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 잠옷같은 에세이
2006-03-03
'음예공간 예찬'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 대해 내가 들었을 때는 이미 절판이라 안타까왔는데 이렇게 다시 번역이 되어 나왔으니 어찌나 반갑던지. 번역도 마음에 들지만 아래 쪽의 여백을 두고 인물들을 설명해 놓은 편집도 좋다.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어 산문에서의 그를 비교해 따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은 화려한 수식어 없이도 화려하며 아름답다.
그가 조근 조근 읊어대는 일본 전통가옥이나 그 속의 그늘에 대해 듣고 있노라면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이 최신의 서양식 아파트가 아니라 대숲소리 들리는 어느 전통여관인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무엇보다 부럽기도 하고 공감을 느끼기도 했던 부분이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충돌에서 저자가 느끼는 고민과 노력, 그리고 일본문화에 대한 그 자부심이었다.
어린 시절 놀러가곤 했던 외갓집은 엄청 품위가 있던 그런 시골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통이 살아 있던 곳이었다.
마당 구석엔 담배를 말리던 높은 건초장이 있었고 사랑방 옆으론 외양간이, 마당엔 내가 갈때마다 한 마리씩 없어지던 닭들이 놀았고 뒷 마당엔 늘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청포도가 매달리던 곳. 그 곳에선 일을 도와주던 아재가 인절미를 위해 절구공을 들었다 놨다 했더랬다
그 집을 버리고 윗 마을에 새로 집을 지었다고 자랑스러워 하던 외갓집을 다시 방문했을 때의 충격이란.
전형적인 양옥집이었는데 입식부엌에 깔끔한 욕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붕도 아니고 옥상에 마당엔 중앙에 커다란 화단을 마련한 걸로도 모자라 그 주변을 모두 시멘트로 발라 놓은 것이다. 물론 방바닥이야 콩기름으로 윤을 내던 전통바닥이 아니라 미끈한 장판이 깔렸었고 말이다.
내가 살 집은 아니었지만 어찌 이렇게도 깡그리 모든 전통을 무시하고 그 시골마을에 이런 집을 지을 생각을 했는지 당시 외삼촌에게 느꼈던 배신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의 그늘 이야기며 애정 이야기며 여행, 뒷간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면 조금은 내 그 배신감이 엷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혹 내 착각일까.
뭔가 이룬 사람의 권위라기 보다 솔직한 모습을 내어 보이며 착착 감겨 오는 그의 글쓰기가 참 마음에 든다.
거기다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성격은 늙고 힘없긴 하지만 늘 주인의 사랑을 받아 온 고양이같이 까다롭기가 말 할 수 없는데 왠지 그 모습이 보기 싫다기보단 실소를 자아낼 만큼 귀엽다고 할까. 꼭 추사
참 오랫만에 아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깔스러운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