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국어를 소망한다.
Jean Dubuffet,The Cow with a Subtile Nose, 1954,Oil and enamel on canvas,88.9 x 116.1 cm.
오정희씨의 소설집 '유년의뜰'을 읽었다.
보통 소설을 읽으면 정신없이 이야기만을 따라가게 되는데 이 번엔 단어들을, 문장들을 곱씹으며 주어 삼켰다.
난 그녀의 소설을 국어사전을 끼고 앉아 읽었다.
원래 사전을 잘 들춰보는 성격이라고 해도 한국소설을 사전찾아가며 읽는다는건 기운빠지는 일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한국소설도 사전찾아가며 읽는 주제에 뭘 독일소설 사전 찾아읽는거에 속상해하나하는 자기합리화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말이다..ㅎㅎ
전에 잠시 언급한적이 있지만 언어라는게 아무리 모국어라도 끊임없이 닦고 연마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기 어렵다.
예전에 누군가 내게 독일어를 환상적으로 한다고 해서 언니에게 자랑삼아 전화했더니
야 한국어도 환상적으로 하기 힘든데 나중에 배운 외국어를 어떻게 환상적으로 한단 말이냐?
아 너무나도 이성적인 내 핏줄이여..흑흑
(물론 숨겨진 사연은 환상적이란 단어가 영어로 치자면 환타스틱이라는 거였으니 여기도 엄청난 번역의 오류가 작용한다..ㅎㅎ)
이 책 저 책을 쌓아놓고 읽으며 조급해하는 내 내면에는 내용에대한 욕구와 함께 언어에 대한 절박함이 깔려있다.
다섯개나 되는 서로 다른 언어들이 내 머리속에 얽혀 중구난방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건 가끔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그럴때마다 난 몇 시간이고 쭈그리고 앉아 한국책을 읽는다.
아무리 나름대로는 노력한다고해도 많은 양의 외국어를 읽어야하는 내겐 남들만큼 내 한국어를 돌보고 가꾼다는건 역부족이다.
내가 쓰는 한국어에서 독일어의 흔적을 볼때 이러단 모국어조차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구사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
그래서 드물기는 해도 명확하고 잘 다듬어진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부럽기도 하고 참 행복하다
반대로 소화되지도 않은 지식을 잔뜩 나열해놓은 비논리적인 글이나 미사여구가득한 장황한 글, 맞춤법이 틀리는 유아틱한 글들에는 거부감이 인다.
요즘처럼 채팅용어가 판을 치는 디지털세상에서 바른 문법이나 맞춤법 다듬어진 언어를 요구한다는건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많은 변화가 있었던 90년대를 한국에서 살아내지 못한 탓인지 김영하나 박민규등의 스타일이 다가오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까?
사회적 산물인 언어를 그 사회적 상황에 맞게 쓰지 못한다면 언어라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불안감이 없다면 거짓일 거다.
내가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칼럼이랍시고 쓰고 있는 건 내 모국어에 대한 훈련이자 시대감각을 익히려는 나름대로의 발버둥이다.
문자언어의 전통이 그리 오래지 않은 나라.. 거기다 식민지시대, 수준떨어지는 번역으로 인한 오염,영어단어를 섞어쓰며 드러내는 근거없는 허영등 한국어의 악재는 많다.
그래도 난 내 모국어가 영어에 덜 오염되고 한국인의 정신이 살아있는 그런 언어로 오래도록 남아주었으면..
내 나라사람들이 우리말을 더 아끼고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론..
천지개벽이 일어나서 내가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는 날이 온다고치고,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가 사는 일이 없다고해도...
명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를 쓰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꾸어본다.
2004.09.02 東京에서...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