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묻은 삶

또 당신에게

史野 2007. 1. 9. 22:30

오랫만에 또 당신에게 공개편지를 띄웁니다.

 

당신께 아직도 화가나있다가보다 이건 당신께 혹은 내게 혹은 나를 아는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나를 만만하게 보는게 아니라고 팔짝 뛰지만 맞아요. 만만하게 본다는 건 다른 게 아니거든요.

어떤 경우에도 난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당신이 나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다는 건 아니랍니다.  이건 꼭 당신때문만은 아니고 어머님도 그러시죠. 어머님도 제가 얼굴빛만 변해도 쩔쩔매시는데 그래도 난 늘 다 이해할 거라고 믿고 계시죠. 그래서 화가나요.

 

당신께도 어머님께도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데 넌 원래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러겠지 하니까 외로운 겁니다. 

 

시댁에서 열을 받고 와도 기댈 친정엄마도 없는데 나도 좀 내 지친 마음을 어딘가에 내려놓고 싶은데 어디 하나 편히 기댈 어깨가 없고 다 내게 기대려 하니 처절하게 외롭더라구요.

 

아니군요 한사람이 있었군요. 내 남자.

 

어제도 신랑이랑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신랑에게 그랬죠 내가 시댁에 가서 개판을 친 이유중 십퍼선트는 질투도 있다구요. 자식이라면 무조건적인 신뢰에 사랑을 주시는 울 시어머니, 그런 엄마를 갖고 있는 당신과 당신동생이 부럽다못해 질투가 난다구요. 그러니까 시누이는 사실 좀 억울하죠. 이거야말로 내 상처때문이지 시누이 잘못은 아니니까요. 시어머님말씀에 의하면 울 시누이 자기가 뭘 잘못했나보다고 일주일내내 바늘방석이었다고 하더군요.

 

아 모르겠어요 한국에 가야하는데 그리고 한국에 가면 또 엄마랑 부딪혀야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어서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서 당신에게 그렇게 화를 마구 내놓고도 결국은 또 표를 사러가지 못했습니다.

12월에도 그랬죠 독일에 갔다와서 너무 힘들었기에 내 나라에 가서 내 모국어로 신세한탄도 하고 좀 위로받고 싶었는데 결국은 엄마때문에 가지 못했죠.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고 지척인 친정을 엄마때문에 가지 못했다니 그게 또 서러워서 울었습니다. 이러니 제가 요즘 불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신랑이랑 그럼 호텔에서 묵는게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했겠습니까. 어제도 신랑이랑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가 그러더군요. 그렇게 당하면서도 엄마랑 인연을 끊지 않는 거 보면 넌 참 신기한 인간이라구요.

 

당신도 기억하시겠지만 그럴려고 했던 적도 있었죠 엄마가 독일에 와서 개판을 치고 갔을때도 신랑 속옷이 젖도록 붙들고 울면서 생각했었죠 그리고 홍콩에서 엄마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걸 알았을때도 다시는 엄마얼굴을 보지 않으리라 결심했더랬죠.

 

물론 엄마를 보지 않으면 더이상 언어폭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자꾸 상처가 덧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런데 그런다고 내 인생이 편해지진 않을거니까. 전생의 업이건 뭐건 어쨌든 엄마랑 나는 천륜이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거지만요.

 

거기다 천륜도 아닌데 울엄마에게 열받고 사는 올케언니에게도 미안하고 그래도 난 자식이니까 그 짐을 좀 나눠지고 싶은데 늘 만신창이가 되어 헤매게 됩니다. 그런 마누라의 넋두리를 늘 받아주는 신랑에게도 미안합니다만 그가 아니면 여긴 어디 내 속을 내어보일 곳이 없으니까 울 신랑 좀 그만 괴롭히라고 당신이 말리고 올케언니가 말려도 어쩔 수가 없네요

 

어제는 갑자기 외할머니가 너무 그리웠어요. 무조건 이쁘다고 무조건 잘한다고 해주시던 할머니. 할머니는 엄마를 무조건 신뢰했는데 내가 봐도 부러울만큼 무조건 사랑하셨는데 왜 우리엄마는 받은 만큼 주지 못하는 걸까. 그래 신랑이랑 그 원인분석을 한다고 쓸데없이 머리깨고 앉아있었더랍니다. 원인을 분석한다고 해서 엄마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제 상처가 아물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도 가진게 많음에도 스스로를 자꾸 외롭게 하고 왕따가 되어가는 엄마가 불쌍하고 그런 엄마를 빼다박은 내가 서러워서 포기가 안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다가 몇 일전에 또 신랑을 붙잡고 도대체 왜 내인생이 이렇게 그지같은 거냐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처음으로 그랬어요. 자기가 너무 힘들어지면 이혼하자고 말해달라구요. 놀란 신랑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러더군요 너 그렇게 나쁜 상황아니라구요. 그래도 제 말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졌답니다.

 

그래도 난 누구처럼 자살도 안하고 귀는 안 자르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러게 말이라고 어쨌든 귀는 자르면 안된다고 그럼 아프다고, 이런 걸 서로 농담이라고 하고 사는 삶이라니.

 

도대체 이 남자는 또 전생에 뭔 죄로 나같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렇게 수많은 밤을 밤잠 설치고도 짜증한 번을 내지 않는 걸까요.

 

그래요 그래서 당신에게 화를 냈어요. 이 남자를 빼면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는데 나를 드러내놓고 보인 사람들은 당신 두 사람, 내가 이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건 당신들 두 사람뿐인데 당신은 자꾸 나를 힘들게만 하니까.

 

내 남자에겐 자꾸 짜증을 내지만 당신에겐 잘했는데 이제 난 더이상 당신에게 해줄게 없는데 우리관계가 이대로 끝나버려도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을만큼 난 당신에게만은 최선을 다했는데..

 

당신을 내가 끝까지 받아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도 힘이 들어요. 아무리 엄마가 그래도 어머님 아버님이 많은 힘이 되어주셨는데 이제 아버님은 안계시고 어머님은 자꾸 무너져가시니 말입니다. 거기다 내 남자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아무리 이러고 저러고해도 내 마누라는 원더우먼이라고 믿는 사람이잖아요.

 

어쩌면 내 인생의 문제는 너무 애쓰며 살기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만 애쓰고 살고 싶어요. 진이 다 빠져버린 기분입니다.

 

원더우먼 같은 것도 안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도 안하고 누구의 고민이나 다 들어주는 영혼의 쓰레기통같은 것도 안하려구요.

 

일년을 꼬박 마흔을 앓았더랍니다.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불혹까지는 아니더라도 마흔이 되면 좀 더 괜찮은 인간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나만 그러면 덜 힘들었을텐데 우린 모두 그런 모습이더군요. 내가 어릴때 기대하던 어른 같은 인간들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이젠 아이처럼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는데 뭔가를 무조건 신뢰할 수도 없는데 괜찮다고 다 잘될거라고 누군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저 그런 모습이란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을 찾고 매달리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인생은 내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죠. 뭐 저도 나름 개판을 칠만큼 쳤으니까 억울할 건 없습니다만 그래도 신이 있다면 만나서 따지고 싶은 게 참 많았더랍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 그 부족한 모습인 나를 그리고 우리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헤맬것이고 갱년기도 앓을 것이고 삶이 두렵고 죽음이 두렵겠지만  그저 흔들리는 게 사는 거란 걸 받아들이고 싶어요

 

길지도 않았던 인생 참 위태롭게 살았습니다. 날마다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래도 당신보다 아니 다른 누구보다 덜 불평하고 살았어요. 당신이 늘 내게 강조하듯이  남들보다 가진게 많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어쨌든 당신

 

인생을 살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당신만큼 저를 이해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다음 달이면 우리가 만난지 15년이 됩니다. 92년 2월 몇 일 차이로 만났던 두 사람, 우연인지 운명인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당신들을 만났지요. 그 15년동안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만 당신 두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거예요.

 

당신만큼 저를 힘들게 한 사람도 없습니다만 당신만큼 저를 행복하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내게 보여준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모습을 사랑하는 겁니다.

 

앞으로도 당신과 내가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데도 당신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 인간인 줄 아는 그는 함께 울어는 줄지언정 그만 힘들어하고 당신을 포기하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죠.

 

그 대신 내가 시댁에서 개판를 쳤어도 이해를 했던 것처럼 당신을 포기한다고 해도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아니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뿐.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니 이젠 당신이 내게 오세요. 내게 더이상 잘보이려고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내게 그냥 벗은 손을 내밀어 주세요.

 

당신이 당신을 신뢰할 수 없다면 나를 그리고 내 판단을 신뢰해주세요.

 

이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마지막 부탁입니다.

 

 

 

 

 

 

 

 

 

 

2007.01.07. Tokyo에서 사야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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