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묻은 책장

종교라는 이름의 폭력

史野 2024. 2. 3. 22:42

요즘 핫하다는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다

이 백페이지남짓의 짧은 소설도 역시나 읽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지난번 이시구로의 소설이 황당할 정도로 격식 있고 올드한 대화체였다면 이 소설의 대화체는 또 사야가 실제로 접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형식의 대화들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지난번도 그렇긴 했는데 이런 문장들은 어떻게 번역하는지 넘 궁금할 정도
워낙 짧은 책인 관계로 한 번은 그냥 쭉 읽고 다시 정성스럽게 읽었다

이 소설은 1985년과 회상이 배경이다
1946년 만우절에 16세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빌 펄롱은 친절하고 부유한 고용주의 보호아래 아버지가 누군지 늘 궁금했던 결핍과 더불어 12살에 엄마마저 잃지만 잘 성장한다
현재 딸 다섯에 넉넉한 살림까진 아니더라도 딸들을 교육시키고 원하는 크리스마스선물을 사줄 수도 있는 나름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런 그가 그의 엄마처럼 역시 미혼모인 수녀원에 감금된 비참한 소녀들을 만나게 된다

종교가 아닌 인간의 따스함을 먹고 자라 따뜻한 나무로 큰 주인공과 정작 관용과 사랑이어야 하는 거대권력 교회의 횡포 그 권력아래 순응하고 사는 사람들의 대비가 스산한 아일랜드 풍경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회화적 이어서일까 소설은 선 굵고 대비가 확실한 루오의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사건
얼마 전에야 필로미나의 기적이라는 영화로 처음 접했었다
수녀들의 경직된 사고와 행동들이 충격적이긴 했어도 주디 덴치의 절제된 연기가 너무 좋았어서 비참하다는 생각까지는 못했다
소설을 읽고는 더 궁금해져 이거저거 검색해보다 막달레나 시스터즈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소설 속의 암울한 상황이 절절히 이해가 갔다
신이 있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신은 아닐 거다
인간이 믿는 신은 결국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규정된 만들어진 신이랄까
수녀들에게 왜 목욕할 때 가운을 입냐니까 하나님이 보고 계시지 않냐고
하나님을 목욕탕이나 훔쳐보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불경이지만 무소부재라면서 그럼 가운 안은 못 보겠냐던 버트란트 러셀의 말이 생각난다


소설의 마지막에 맨발로 걷는 소녀와 아내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인 신발을 들고 걷는 주인공이 나온다
소녀에게 그 신발을 신겨줄 수는 없었던 걸까
열린 결말이지만 주인공이 겪게 될 일은 명약관화인데 그 대비로 마무리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설마 그도 그냥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