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따뜻한 은신처

또 한뼘의 자유

史野 2015. 12. 29. 01:57

물이 나오지 않는 46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영하 구도까지 떨어졌는 데도 보일러도 못 돌리고...

그래도 살아지더라. 그것도 별로 안 고통스럽게 그냥 살아지더라..ㅎㅎ


일부러 한 체험학습은 아니었지만 평소 얼마나 많은 물을 쓸데없이(?) 소비하고 있는 지도 알았고 물을 맘껏 쓴다는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 지도 알았다. 그러니까 이건 사야가 앞으로는 물을 아껴쓰겠습니다 뭐 이런 반성문이 아니다..ㅎㅎ


물없이 하루가 지나니 가장 공포스러운 게 화장실 문제였는 데 다행히 화장실이 두개였고 사야는 평소에도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 지라 그것도 다행이었다만 마당의 수곽에 있던 물까지 긁어다 해결을 하다보니 정말 변기에 들어가는 물이 어마어마한 양이란 걸 새삼 또 깨달았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사야가 아파트에 사는 것도 아니니 물이 없이도 사실은 배변활동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사야는 48년이 조금 넘는 인생을 살면서 정확히 24년을 양변기 없이 살았더라구.

가장 공포스러운 문제가 생각해보니 사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더라


아 무엇보다 사야에게 맷집이란 게 생긴 것 같다.

어제는 좀 당황스러워서 수도연결을 인터넷으로 알아보는 데 세상에나 사야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더라

어차피 동절기엔 신청을 안 받아준다니 만약 지하수에 문제가 생겨 고칠 수 없다면 꼬박 두달넘게 사야는 물이 없이 살아야할 상황.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충격받고 어쩌고가 아니라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살 수 있을 것 같더라구


그래 그게 참 위안이 되었다. 놀래 안절부절하는 게 아니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그 생각.

물론 생수를 살 수있고 원하면 목욕탕에도 갈 수 있고 세탁물은 맡길 곳도 있는 세상이니 가능한 생각이기도 하겠다만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서 일이킬로 떨어진 청미천변에가서 세수를 하거나 꼭 필요한 물을 가져오거나 해야한다고 해도 사야는 살 수 있을 것 같더라구

그러니까 사야에게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그냥 산다는 거더라구.

이건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아니라 아마 그래서 사야는 어떤 나라를 떠돌아도 뭔 일이 닥쳐도 별로 안 놀랬었나보다.

하긴 뭐 남극에가서 펭귄언어라도 배울 수 있다고 했었으니 오죽하겠냐만..ㅎㅎ


그래도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워낙 조심스러워서 말로라도 부정탈까봐, 그래 사야가 평생 시달린 그 불면증이나 불안장애가 완전 해소되었다고 믿지는 않는다만..


이틀이었는 데 평소처럼 잘 자고 깨어서는 '맞다 물이 안나오지' 이러고 침대에서 뒹굴다가(!) 일어나 커피마시고 ㅎㅎ

휴대폰번호도 알고 있음에도 사무실 전화 몇 번 해보고 안 받으니까 아 일요일이라서 안 받으시나보다 포기하고..

오늘 저녁엔 물나온다고 신나서 욕실 청소 한바탕 하고..

그래 딱 또 이만큼의 자유. 포기에서 오는 자유와 더불어 물을 맘껏 쓴다는 것 조차 일종의 자유라는 걸 알게 되어 다행이다.


글쎄 늘 묻는다만 산다는 게 뭘까

불행인 지 다행인 지 '이렇게 살바에는 안사는 게 낫다', 이럴 이유가 사야에겐 없네

장작가지러 나갔더니 달도 밝고 별도 이쁘고 찬바람은 시원하고..

사야는 어찌 살건 그냥 사는 게 참 좋다.

아니 다르게 말해야겠다.

그걸 느낄 수 있어서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