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따뜻한 은신처

영화 '암살'과 인간의 삶

史野 2015. 10. 19. 21:41

드디어 그 유명한 영화인 암살을 봤다.

사실 요즘 사야는 한국영화에 거의 관심이 없고 천만이 넘는다는 영화엔 더더욱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요즘 국정교과서논란에 달리는 댓글들에 암살의 대사들이 인용이 되더라는 거다.

그래 잠시 고민을 하다가 거액을 주고 결국 봤다..ㅎㅎ

영화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던데다 관심도 없어서 내용자체를 아예 몰랐기에 무척 재미있었다. 물론 막판에 이정재가 산책을 하는 걸로 깔끔하게 끝났어야하는데 총맞아 죽는 게 좀 안타까왔지만 그 마지막 장면에 영화의 한줄요약이 들어있으니 또 아쉬울 건 없었다.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사야는 이 말이 이 영화의 핵심이고 친일파문제도 이 시각에서 봐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친일청산문제를 자꾸 프랑스의 부역자처단이랑 비교들 하는데 일제치하인 오십년(역시 강점기뿐 아니라 그전 친일정권때부터 계산해야한다고 생각함)남짓 세월과 사년남짓의 세월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역사가 시간인데 어찌 시간을 빼고 비교가 가능하단 말이냐.

사야가 지금 만으로 마흔여덟이니 사야가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해에 태어났다고 치면 아직 광복도 되지 않은, 진짜 어마어하하게 긴 시간이란 이야기다.

사야에겐 박통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이 되고 다시 그 딸이 대통령이 된 이 시간도 사야의 이 짧은 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 그것보다도 더 긴 시간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그 깔끔한 친일청산이라는 건 어쩌면 신기루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꾸 그 역사속에 사람이 그것도 보통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굳이 그 당시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 지까지 머리터지게 고민해볼 필요도 없다.

87민주항쟁이후로 근 삼십년, 당시 항쟁을 이끌던 주체들과 동조하던 사람들 모두 이젠 이 사회에서 중요한 허리부분을 차지하고 살아가고들 있다.

이명박정부 출범후 팔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일들이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데 그 누구하나 찍소리 못하고들 살아가고 있다고.

왜냐고? 그건 너무나 단순하다. 그들에게도 자식들이 있고 그들도 살아야하니까..

맛있는 음식이나 편안한 집이나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거다. 특히 이 나라사람들에게 자식은 어떤 가치척도가 아닌 불변의 진리이자 신앙이기도 하다는 게 이해의 실마리일 지도 모르겠다.


양비론도 양시론도 아니고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시대를 이 시대를 어찌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사야의 나름 처절한 문제의식이다.

영화한편보고 뭐 그리 심각하냐고? 심각안하게 생겼냐  안그래도 이 가여운 나라는 해결할 일이 태산에 갈 길도 먼데 이젠 국정교과서문제로 또 이 난리인데 말이다.

얼마전 뉴스에서 고영주이사장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랬다. 사야가 보기에는 노통보다도 더 인자하게 생겼더라.

그의 신념에 경의를 표한다. 사야가 관상쟁이는 아니지만 ' 과연 이게 옳은 걸까' 를 고민해본 얼굴이 아니다.

그래서 더 아프다. 영화속에서도 잠시 보이던 데 동굴속에서 독립군이란 명목아래 화적떼 비슷한 삶을 살다 간 그 수많은 영혼들이 가여워서..

그 어린애들이 과연 신념때문에 싸웠을까..

긴병에 효자없다고 변절도 어쩌면 개인의 선택이었다기보다는 역사의 그 시간속에서의 필연인 지도..

희망을 논의하기엔 너무 멀리온 게 아닐까 싶었는 데 이젠 그 희망이 구체적으로 뭔가에 대해 다시 논의해야하는 건 아닐까..


각설하고 전지현은 물건이더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