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러운 밤
24시간 재워놨던 후지살.
작은 덩어리는 난로속에 넣고 큰 덩어리는 반으로 잘라 반은 말려보고 반은 그냥 오븐에 굽기로 결정했다.
저렴한 고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실패하면 아까우니까 세가지 시도를 해보기로 한 것.
오븐을 예열해놓고 호일에 싼 고기를 난로에 넣은 후 새로 시작한 프로그램인 지 클래식음악을 보여주는 게 있길래 보고있다가 부엌에 갔더니 이게 왠일? 아예 전원이 다 나가있다.
누전차단기를 확인해보니 주방만 내려가있네.
어제밤에도 오븐을 썼고 무슨 영문인 지 몰라 다시 시도해봤는 데 역시나 차단이다.
몇달전 달걀삶는 기계로 달걀을 삶다가도 이런 일이 생긴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야하나보다.
부엌에는 아시다시피 냉장고도 있는데다 사야네 집은 보일러까지 주방쪽이라 순간 너무 당황스럽더라지.
요리고 뭐고 오븐을 끄긴했는 데 제일 중요한 주방쪽에 문제가 생기니 불안불안하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누구에게 전화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아 답답하고 속상해.
사주간이나 장을 보러가지 않았던 지라 텅텅빈 냉장고를 이제 막 채워놨는데..글고 보일러가 안돌면 추운 건 둘째치고 어찌 씼으라고..ㅜㅜ
워낙 촌구석에 살기도 하고 전기가 끊기면 나름 난방은 장작난로로 하고 음식은 가스레인지로 하고 조명은 촛불로 하고 어쩌고 그랬다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여긴 지하수니 전기없이는 물도 쓸 수 없고 그건 화장실도 쓸 수 없다는 의미.
가스떨어진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전기로 해먹을 수 있으니 그냥 버티고 있었는데 내일은 일어나자마자 가스부터 시켜야겠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과도 별도로 나름은 무언가에서 자유로와지는 훈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 데 그게 아니다.
물론 요즘이야 스마트폰이 있으니 아주 끊기는 건 아니겠지만 만약 사야가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곳에 있다면 지금의 이 삶이 가능할까.
아니 사람을 안만나고도 버텨낼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의 마음공부가 되면 그 조차도 가능해질까.
그러니까 그저 밖을 바라보건 책을 읽건 아님 산책을 하건 그것도 아니면 아무생각도 하기 힘든 풀을 뽑건 근 오십평생을 거름삼아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이 가능해질까.
이 생에 왔다간 흔적따윈 필요없고 그저 개님들과 소통하며 눈이오고 비가오고 꽃이피는 이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생기고 소멸하는 이 얄짤없는 진리속에 무던히 녹아내릴 수 있는 걸까.
생노병사 희노애락, 뭐 그런 거창한 문구가 아닌 그저 이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으려나.
그래 누전차단기때문에 참 멀리도 왔다만.
전기하나에도 벌벌떠는 이 모든 첨단기기가 가득한 집안에서, 그 첨단 기기랑 별 상관없는 울 새깽이들과 살면서 더 상관없는 풍경을 보다보면 이 생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의미가 뭔지를 사실은 잘 모르겠다.
새깽이들을 키우면서 제일 답답한 게 뭐가 맛있는 지 뭘 원하는 지 어디가 아픈 지를 모른다는 건데 외국어가 아닌 같은 언어를 쓰는 인간들도 결국은 말.안.해.주면. 모른다는 것. 아니 말.해.줘.도. 본인이 경험하지 않는 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소통이란 건 결코 언어때문이 아니라 마음 아니 그것도 그저 서로의 경험치에 불과하다는 것.
컴퓨터보다 더 완전체이여할 인간들이 사실은 너무나 무분별하고 감정적인 인풋으로 인해 예상할 수도 없는 아웃풋을 인간속에 들어가 숙성되어있던 그 것까지 합해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것들을 내보내고 있다는 것.
사야가 좋아한 적도 없지만 죽을 때까지 집착을 못 놓았던 법정스님
반면교사랄까, 왜 안 좋아했는 지 알게해주고 떠나서 고맙긴 한데 그래도 철퍼덕.
너라도 좀 나를 배신해주지 그랬니? 하는 마음이였달까
그래 글이 길어지고 사야는 또 술 주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야에겐 지금 이런 술주정이 가능한 자체가 기적이다.
그러니까 뭐? ㅎㅎ
인간은 그게 어떤 방식이건 소멸에대한 두려움으로 이 삶을 버텨간다는 거지.
자기체면을 걸며 그 소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려 발버둥친다는 거지.
근데 그걸 모르니까 그저 삶을 소비하고 있다는 거지
알면 어쩔거냐구?
뭘 어째 그냥 같이 그게 어떤 방식이던 함께 소비하는 거지
그리고 나는 최대한 오래살거라고 믿는 거지
그리고 그땐 이 삶을 이해할 수도 있을 거란 희망도 가져보는 거지 희망이야 뭐 어때 가진다고 돈이드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딱 이 생만 살면 억울하니까 하늘나라도 꿈꾸고 윤회도 꿈꾸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
근데 나도 그래 사주도 있고 운명도 있고 하나님의 사람도 있고 어쩌고 하지만
겨우 열일곱살인 삼백명의 아이들이 같은 운명과 사주를 타고 났다는 건 좀 대단하잖아?
그 부모나 형제 최소한 천명은 그걸로 이 생이 이 생이 아닐텐데 정말 뭔가 있지 않을까
아 그래 술 취했다구
진짜 오랫만에 아침 아홉시에 일어났는 데 정말 별것도 아닌 그 것에 무진장 감동했는 데..ㅎㅎ
가장 현실적인 주방의 전원이 나가버려 이렇게 되긴 했지만 그리고 뭐 위에도 줄줄히 썼지만 그래서 인생이 바뀌거나 뭐 그런 건 아닌데 말이야
오늘 국제시장을 보시러 어느 아주머니께서 손수건까지 챙겨서 울고불고 하셨다네?
아이들이 물속에서 살아나오려고 손톱이 빠지도록 긁어댔는 데도 단 한 놈도 못 살린 이 나라에서 절대 말할 수 없는 주어도 없고 아주 특별한 그 분이 영화를 보시다 우셨다네.
그냥 그렇다구
결론은 버킹검이라고
우짜든둥 사야는 저 고기를 잘 구워서 새깽이들과 맛있게 먹어야겠다구.